트위터공유 페이스북공유
  • 글자크게
  • 글자작게
  • 인쇄하기
  • 스크랩하기
[매거진] 보스턴 왕조의 마지막 퍼즐, 빌 러셀
최연길()
기사작성일 : 2018-02-17 23:16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1950년대 중반 등장한 보스턴 셀틱스 왕조는 NBA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보스턴이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이전에 암묵적으로 지켜져 오던 흑인 쿼터제를 깬 것이다. 보스턴의 레드 아워백 감독은 여러 흑인 선수들을 중용 하며 보스턴을 13시즌 동안 11번이나 우승시켰다. 그리고 보스턴 왕조의 시작은 빌 러셀이었다.

* 본 칼럼은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빌 러셀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팀 플레이어였다. 농구뿐 아니라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팀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 빌 러셀이 가세한 보스턴 셀틱스는 1956-1957시즌부터 13시즌 동안 8년 연속 우승을 포함, 총 11번 우승을 차지하며 왕조를 구축했다. 그간 공격력은 좋았어도 수비가 안 좋았던 보스턴에게 빌 러셀의 가세는 우승을 위한 마지막 퍼즐과도 같았다.

빌 러셀 딜레마
빌 러셀은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반지를 차지한 선수다. 그런데 러셀을 처음 드래프트에서 지명했던 팀은 보스턴이 아닌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였다. 세인트루이스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시즌 동안 보스턴과 네 차례 파이널에서 만나 1958년 보스턴을 격파하고 구단의 유일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러셀이 13년을 뛰는 동안 파이널에서 보스턴을 무너뜨린 팀은 세인트루이스와 1967년 윌트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 76ers 뿐이다. 또한 세인트루이스는 NBA 역사상 백인들로만 구성된 마지막 챔피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세인트루이스는 러셀을 트레이드했을까. 이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러셀과 그 이전의 흑인 선수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셀은 보스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K.C 존스 등과 함께 1955년과 1956년 샌프란시스코 대학을 55연승과 NCAA 토너먼트 2연패로 이끈 대단한 선수였다. 러셀은 206cm(208cm라는 기록도 있음)로 신장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224cm의 긴 팔과 엄청난 운동능력 그리고 왼손잡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는 괴물이었다. 러셀은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3시즌 동안 평균 20.7득점, 20.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NCAA 디비전1 역사상 ‘통산 평균 20-20’을 기록한 선수는 단 5명으로 러셀 외에 줄리어스 어빙, 아티스 길모어, 커밋 워싱턴. 폴 사일러스 밖에 없다.

하지만 1956년 NBA 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구단들이 러셀을 뽑는데 주저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이 척 쿠퍼를 지명하며 인종의 장벽은 허물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차별과 쿼터 제도(Quota System)가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물론 NBA 공식 기록과 규정에는 쿼터 제도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수들과 코치, 구단주들은 암묵적으로 이를 지키고 있었다. 쿼터 제도의 내용은 이랬다. 한 팀에 흑인 선수는 최다 2명이고 코트 위에 출전할 수 있는 흑인 선수는 1명이라는 것이다. 한 팀에 흑인 선수 2명을 둘 수 있는 이유도 간단했다. 그래야 흑인 선수들끼리 룸메이트가 되고 흑인과 백인 룸메이트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러셀이 서부 해안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NBA 구단들은 대부분 동부에 있었고 몇몇 구단들이 중부에 있었지만 서부에는 팀들이 없었다. 당시 NCAA도 이동의 문제 때문에 서부 팀들이 동부로 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또한 당시는 TV 중계도 현재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고 현재처럼 모든 구단들이 스카우팅 시스템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러셀의 실제 플레이를 본 감독이나 구단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세 번째 이유는 러셀이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를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러셀이 NBA를 택하지 않고 글로브트로터스에 입단한다면 드래프트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 이유는 그가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다는 것이다. 1956년 올림픽은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렸다.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에 북반구의 겨울에 하계 올림픽이 열렸고 NBA 시즌과 올림픽 기간이 겹쳤다. 당시 올림픽에는 프로 선수들이 참가할 수 없어 러셀을 지명한 구단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러셀 없이 경기를 치러야 만했다.

일각에서는 러셀이 제2의 월터 듀크스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213cm의 장신 흑인 센터였던 듀크스는 시튼홀 대학 4학년 때 26.1득점, 22.2리바운드라는 괴물 같은 기록을 남기며 1953년 드래프트에서 지역 연고 드래프트로 뉴욕 닉스에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듀크스는 3시즌을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 뛰었고 1955년에서야 뉴욕에 합류했다. 듀크스가 뉴욕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네드 아이리시 구단주와 팬들의 바람은 컸다. 그러나 듀크스는 1955-1956 시즌 60경기에 출장해 7.8득점, 7.4리바운드, 0.7어시스트에 그치며 모두를 실망시켰다. 러셀도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야 정식 농구를 시작해 기술이 뛰어나지 않다는 소문이 있어 NBA에서는 기대 이하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여러 구단들은 대학 최고 선수였던 러셀의 지명을 두고 고민해야 했다.



러셀이 보스턴에 오기까지
1956년 NBA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은 로체스터 로열스가 가지고 있었다. 2순위는 세인트루이스에게 돌아갔다. 보스턴은 지역 연고 드래프트로 홀리 크로스 대학 출신 센터 겸 포워드 탐 하인슨을 지명해 1라운드 지명권이 없었다. 이름값만 본다면 당연히 1순위는 러셀이 차지해야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러셀이 1순위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뉴욕에서 두 차례 열린 대학농구 올스타전에서 러셀의 모습이 기대 이하였기 때문에 각 구단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에 대해 당시 로체스터의 구단주였던 레스터 해리슨은 훗날 “당시 러셀은 저를 속였습니다.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대학 농구 올스타전에서 일부러 열심히 뛰지 않았던 것이죠. 로체스터 같은 작은 시장에서 뛰기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각 팀들이 망설이는 사이 보스턴의 감독이던 레드 아워백은 러셀이 자신을 우승으로 이끌 마지막 퍼즐 조각임을 확신했다. 러셀이 고교시절 정식 선수로 뛴 기간은 겨우 반 시즌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기술은 투박했지만 육상선수답게 높이 뛰고 활동량이 어마 어마 했다. 러셀은 대학 진학 후 필 울퍼트 감독 밑에서 농구를 배웠는데, 당시 울퍼트 감독은 강력한 수비에 이은 속공이 주무기였던 감독이었다. 그런 울퍼트 감독과 샌프란시스코 대학에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바로 러셀이었다. 

레드 아워백은 이런 러셀이 온다면 보스턴의 구멍을 충분히 메워주리라 믿었다. 아워백은 즉시 지인들로부터 러셀과 관련된 정보를 구했다. 캘리포니아 대학 감독을 맡던 피트 뉴월 감독은 아워백에게  “글로브트로터스가 연봉 5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러셀은 NBA에서 뛸 수 있다면 25,000달러 정도에 계약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보스턴 셀틱스 선수 출신으로, 은퇴 후 고향인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던 흑인 최초의 NBA 올스타 돈 박스데일은 러셀을 만나 보스턴과 아워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설득에 나섰다. 박스데일은 러셀과 그의 아버지를 만나 “글로브트로터스는 매년 230경기를 뛴다. 하지만 NBA는 고작 70여 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글로브트로터스에서 광대짓을 할 거냐”라며 설득에 성공했다. 당시 박스데일이 흑인 최초의 올림피언이었다는 점에서 흑인 선수들에게 신망이 높았다는 점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이 뽑고 싶다고 해서 러셀을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구단이 먼저 러셀을 낚아 챌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1라운드 지명권을 갖고 있던 로체스터는 고심 끝에 러셀을 포기했다. 문제는 2순위 세인트루이스였다.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자 역대 최고의 단장으로 꼽히는 아워백은 여기서 묘수를 찾았다. 세인트루이스는 인종차별이 심한 곳으로 흑인 선수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당시 보스턴에는 올스타 출신 센터 에드 맥컬리(203cm)가 있었다. 맥컬리는 세인트루이스 대학 출신으로 고향도 세인트루이스였다. 당연히 세인트루이스의 지역 스타이기도 했다. 아워백은 세인트루이스의 구단주 벤 커너와 단장이던 마티 블레이크에게 “맥컬리를 줄 테니 러셀을 뽑은 후 트레이드하자”고 제안했다. 

커너는 당시 글로브트로터스가 러셀에게 5만 달러를 제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은 그 정도의 연봉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보스턴의 제안에 솔깃했다. 농구에 미친 구단주 커너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커너는 아워백이 맥컬리를 줄 테니 지명권을 넘기라고 제안하자 한 발 더 나아가 “클리프 헤이건까지 달라. 우리는 선수들이 필요하다. 맥컬리 만으로는 부족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헤이건은 켄티키 대학 출신 스몰포워드로 193cm로 큰 키는 아니지만 터프했고 정확한 훅슛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헤이건은 1953년 보스턴이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지명한 선수였지만 군 문제로 1956-1957시즌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두 팀간 트레이드는 성사되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혹시라도 로체스터가 러셀을 지명하면 기껏 성사시킨 트레이드가 허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아워백의 재치가 발휘되었다. 당시 해리슨은 아이스 카페이드(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참가하는 유명 아이스 쇼) 표를 구하고 있었다. 보스턴의 월터 브라운은 해리슨에게 자신이 아이스 카페이드표를 구해줄 테니 어차피 계약하기 힘든 러셀을 지명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결국 1956년 NBA 드래프트에서 로체스터는 듀케인 대학 출신 시휴고 그린을 1순위로 지명했고 세인트루이스가 빌 러셀을 2순위로 지명한 후 보스턴과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운명을 바꾼 트레이드?
NBA를 잘 모르는 팬들이라면 러셀을 맥컬리와 헤이건과 트레이드한 세인트루이스는 역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구단이라고 단정 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세인트루이스가 손해를 본 것일까? 만약 러셀이 세인트루이스에 지명을 받았고 트레이드되지 않았다면 세인트루이스가 왕조가 되었을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결과론 적으로 봐도 세인트루이스가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당시 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흑인 선수들이 세인트루이스로 원정을 가면 “깜둥이(Nigger, Coon), 원숭이”라는 폭언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원정에서는 흑인 선수들이 호텔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만약 러셀이 보스턴이 아닌 세인트루이스에 갔다면 어쩌면 우리는 러셀을 기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러셀은 보스턴에서 뛰면서도 인종차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따라서 세인트루이스였다면 더욱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러셀을 보냈지만 클리프 헤이건과 에드 맥컬리를 얻었다. 맥컬리는 이미 올스타에 수차례 뽑혔던 검증된 선수였고 세인트루이스가 고향이고 세인트루이스 대학 출신이라 지역 팬들이 상당했다. 또한 헤이건은 향후 올스타에 6차례나 뽑힌 선수였다. 스몰포워드였지만 리바운드도 좋았고 득점력도 상당했다. 물론 두 선수는 모두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 전설적인 스타가 되었다.

또한 보스턴이 왕조를 이룬 1957년부터 1969년까지 13시즌 동안 11번의 우승을 했지만 이 기간 동안 세인트루이스도 1958년 우승과 1957, 1960, 1961년 3차례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따라서 크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힘겹게 맞춰진 마지막 퍼즐
1956-1957시즌 보스턴은 러셀 없이 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러셀이 11월 22일부터 12월 8일까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러셀은 올림픽이 끝나기 전까지 계약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올림픽은 순수한 아마추어들의 경연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스턴은 큰 문제가 없었다. 루키 톰 하인슨이 16.2득점 9.8리바운드를 올리며 파워포워드로 맹활약했고 밥 쿠지와 빌 샤먼이라는 당대 최고의 백코트 콤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은 또한 NBA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식스맨 프랭크 램지와 짐 로스커토프 등이 버티고 있었다. 보스턴은 1956-1957시즌 경기당 105.5득점이라는 가공할 득점력으로 득점 부문 1위를 달렸고 러셀이 없는 동안 16승 8패라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러셀은 보스턴과 연봉 17,000달러(시즌 중반에 계약했기 때문)에 계약을 맺었고 1956년 12월 22일(이하 현지시간)에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러셀의 데뷔전은 자신을 지명했다 트레이드 시킨 세인트루이스였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10승 14패로 하위권에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거칠었고 보스턴은 한때 16점까지 뒤지다 4쿼터 대반격에 나서며 샤먼의 결승골로 95-93으로 이겼다. 이날 러셀은 6득점, 16리바운드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겼다. 야투도 11개 중 3개만 성공했고 자유투는 4개를 얻어 모두 실패했다.

이후 보스턴은 포트웨인 피스톤스,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에게 패하며 개막 이후 두 번째 연패에 빠졌다. 러셀이 가세하면 더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보스턴은 러셀 가세 이후 13경기에서 7승 6패에 그쳤다. 그러자 보스턴의 여론은 러셀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보스턴 지역 스포츠 전문기자인 탐 캐리는 칼럼에서 “러셀이 17,000달러의 가치가 있을까? 아니다. 나는 러셀보다 뛰어난 리바운더 4명의 이름을 댈 수 있다. 그는 과대 평가되었다. 그는 24~25분을 뛰면 지친다. 또한 러셀의 리바운드는 하인슨 덕이다. 하인슨이 꾸준히 박스 아웃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러셀이 리바운드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1월 8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뉴욕 닉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러셀은 뉴욕의 노장 센터 해리 갤러틴에게 농락을 당했다. 갤러틴은 이날 26득점, 1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2득점, 13리바운드에 그친 러셀을 압도했다. 결국 전통의 라이벌전에서 뉴욕이 보스턴을 113-102로 제압했다. 하지만 러셀이 적응을 마치자 보스턴은 달라졌다. 보스턴은 1월 중순부터 7연승을 달리는 등 13경기에서 11승을 챙기며 선두 독주 체제에 나섰다. 결국 보스턴은 44승 28패로 2위 시라큐스 내셔널스를 6경기차로 따돌리고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보스턴의 상승세는 이어졌다. 보스턴은 동부 지구 결승전에서 2번 시드 시라큐스를 3전 전승으로 가볍게 제압하며 창단 이후 처음으로 파이널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NBA 파이널의 상대는 러셀을 지명했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였다.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