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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전도사,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최연길()
기사작성일 : 2017-09-08 09:49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 미국 농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할렘 농구’라는 단어를 안다. 미국 농구에 문외한인 감독들도 선수들이 화려한 플레이를 하려하면 ‘너 할렘 농구하냐?’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할렘 농구’란 묘기 농구로 유명한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농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는 묘기 농구가 전부가 아니었다. 농구가 세계적인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오리지널 셀틱스, 뉴욕 르네상스. 이 세 팀은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명문 구단들이다. NBA가 생기기 이전부터 최강 팀들이었고 농구 인기를 이끌었던 명가였다. 셀틱스는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된 팀이었고 르네상스(일명 뉴욕 렌스 혹은 할렘 렌스로도 불림)는 전원이 흑인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 두 팀은 NBL, BAA 등 프로농구 리그가 생기며 쇠퇴했다. 하지만 글로브트로터스는 여전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농구 전도사와 홍보대사 역할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출발은 할렘이 아닌 시카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는 뉴욕 할렘이 연고야 한다. 하지만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출발은 뉴욕과는 거리가 먼 일리노이 주(州) 시카고였다. 1926년 웬델 필립스 고등학교 농구부 출신이었던 레스터 존슨(Lester Johnson), 월터 ‘투츠’ 라이트(Walter ‘Toots’ Wright), 랜돌프 램지(Randolph Ramsey), 타미 브루킨스(Tommy Brookins), 인만 잭슨(Inman Jackson)과 웬델 필립스 고등학교의 라이벌 고등학교 출신인 윌리엄 왓슨(William Watson) 등 6명은 함께 세미프로 농구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들이 졸업한 고등학교는 흑인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고 당연히 6명 모두 흑인들이었다. 이들은 흑인 축구 스타 출신인 딕 헛슨(Dick Hudson)을 매니저로 삼고 ‘사보이 빅 파이브(The Savoy Big 5)’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사보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주무대로 삼고 싶어 했던 시카고의 유명한 사교 댄스장 ‘사보이 볼룸(Savoy Ballroom)’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사보이 볼룸 밴드의 리더였던 캡 캘러웨이(Cab Calloway)는 “농구 전반전이 끝나면 피아노를 오디토리움 중앙으로 가져와 노래를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죠”라고 당시 분위기를 회상했다. 
사보이 빅 파이브의 시작은 불안했다. 당시 농구라는 종목이 대학 농구를 제외하면 큰 인기를 끌지 못했고 중부에 위치한 시카고는 동부 지역에 비해 농구에 관심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흑인들로 구성된 사보이 빅 파이브의 한계는 명확했다. 사보이 빅 파이브는 사보이 볼룸에서 댄스가 시작되기 전 농구 경기로 오프닝을 담당했지만 벌이도 시원치 않았고 반응도 거의 없었다. 사보이 빅 파이브의 리더였던 타미 브루클린과 헛슨은 자주 다투기도 했다. 결국 팀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몇몇 선수들은 팀을 이탈하기도 했다.

헛슨은 이런 위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26살의 유소년 농구 감독 에이브 새퍼스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새퍼스틴은 고교 시절 농구를 했다고 하지만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아니었고 코치로도 명성을 떨치던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헛슨은 그의 프로모터로서 능력과 뛰어난 언변이 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새퍼스틴은 자신의 팀이 흑인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당시 농구의 중심이 뉴욕이라는 점을 착안해 팀명을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로 변경하게 되었다. 

글로브트로터스의 구세주

새퍼스틴은 부모님이 폴란드 출신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심해지자 1900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02년 아들 에이브가 태어났다. 1907년 다시 새퍼스틴 가족은 미국 시카고로 이주했고 새퍼스틴은 시카고에서 성장했다. 새퍼스틴은 어린 시절 복싱, 야구, 농구 등 다양한 종목을 경험했다. 



이후 새퍼스틴은 야구와 농구에서 팀 대전을 연결하는 부킹 매니저 역할을 했고 그러다 위기에 빠진 사보이 빅 파이브 팀의 감독 겸 매니저가 되었다. 새퍼스틴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팀명을 뉴욕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로 바꾸었다. 또한 당시 많은 팀들이 했던 것처럼 유랑생활(Barnstorming)을 하면서 팀을 꾸려나갔다. 글로브트로터스는 인지도가 떨어져서인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벌이도 신통치 않았지만, 대공황 시절이었기에 선수들은 직업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팀을 떠나지 않았다. 1927년 새퍼스틴은 다른 팀들처럼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유명한 백인 구단 오리지널 셀틱스와 흑인 구단 할렘 렌스 외에도 필라델피아 스파스(SPHAS, Southern Philadelphia Hebrew Association)라는 유대인 팀과 홍와치스(Hong Wa Q's)라는 중국인 팀 등 다양한 팀들이 전국을 유랑하며 경기를 치렀다. 1927년 1월 7일(이하 현지시간) 글로브트로터스는 일리노이 북부에 위치한 힌클리에서 역사적인 첫 경기를 치렀다. 이날 글로브트로터스는 승리를 거두며 수당으로 75달러를 받았다. 당시 글로브트로터스는 6명의 선수들이 약 10달러 정도를 나눠가졌고 나머지 금액은 새퍼스틴의 몫이었다.

이후에도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시카고 로욜라 대학에서 열린 경기는 관중이 달랑 27명만 입장했고 총수익금은 9.75달러에 불과했다. 새퍼스틴은 이날 “5달러만 주시면 가서 샌드위치를 사먹겠다”라고 사정했다. 그나마 수익을 받으면 다행이었고 어떤 경우는 숙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또한 흑인 선수들로 구성된 글로브트로터스는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과도 싸워야 했다. 숙소와 식당에서 출입을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새벽에 호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로브트로터스가 희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월드 투어를 하고 유명 구단이 되겠다는 야망을 지닌 새퍼스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퍼스틴은 힘든 선수들을 다독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많은 경기를 성사시켰다. 또한 스스로 감독, 운전사,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 해냈다. 훗날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와 76ers의 구단 아나운서였고 새퍼스틴의 절친이었던 데이브 진코프는 “새퍼스틴은 에스키모에게 이글루를 가지고 아프리카 콩고로 이사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그의 언변을 평가한 바 있다. 이런 새퍼스틴이 있었기에 글로브트로터스 선수들은 그를 믿고 의지했고 팀은 연명할 수 있었다. 

글로브트로터스, 묘기 농구로 팬들을 사로잡다. 

글로브트로터스는 현재까지도 묘기 농구단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묘기 농구단은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승리가 절실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묘기 농구로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캐나다 브리티스 컬럼비아 주(州) 우드파이버에서 경기를 가졌을 때였다. 당시 글로브트로터스는 관중들의 심한 인종차별적인 행위에 격앙되었다. 또한 상대팀 플레이도 거칠었다. 글로브트로터스의 선수였던 런트 풀린스는 선수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했고,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경기 후반 점수가 112-5까지 벌어지자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그러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풀린스가 다리 사이로 드리블을 하다 인만 잭슨에게 패스했고 잭슨은 다시 비하인드 더 백 패스로 키드 올리버에게 연결했다. 올리버는 공을 공중으로 띄운 후 목 뒤로 잡았다가 다시 팔사이로 공을 굴리는 묘기를 보였다. 글로브트로터스에 적대적이었던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팬들은 경기 후 박수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글로브트로터스는 묘기를 부리면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명성도 점점 쌓여갔다. 

글로브트로터스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된데 지대한 역할을 한 선수들을 굳이 꼽자면 리스 ‘구스’ 테이텀(Reece 'Goose' Tatum)과 마키스 헤인즈(Marques Haynes) 두 명이다. 물론 이들의 선배였던 풀린스나 잭슨 등의 역할도 컸지만 테이텀과 헤인즈의 존재감은 이보다 더 대단했다. 테이텀은 원래 야구 선수였다. 



1940년대, 글로브트로터스의 명성이 올라가자 수많은 흑인 대학 선수들이 글로브트로터스 입단을 희망했다. 그때 새퍼스틴의 친구였던 윈필드 웰치가 전화를 걸었다. 웰치는 흑인 야구 리그의 한 선수가 농구를 해야 하는데 야구를 한다며 새퍼스틴에게 그 선수를 살펴보라고 했다. 그 선수가 바로 리스 테이텀이었다. 1루수였던 테이텀은 타율은 낮았지만 수비력이 뛰어났다. 194cm의 신장에 팔길이가 무려 210cm였던 테이텀은 글로브트로터스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테이텀은 야구 선수시절 팀이 크게 앞서면 타구를 날린 후 1루가 아닌 3루로 뛰거나 공을 잡을 때 등 뒤로 잡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해 관중들을 웃기곤 했다. 테이텀은 웰치의 조언으로 글로브트로터스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하지만 농구 경험이 많지 않은 테이텀의 슛은 빗나갔고 기본기도 부족했다. 테이텀은 자신이 떨어질 것이라고 직감했지만 새퍼스틴은 그의 잠재력과 유머감각, 신체조건을 보고 합격을 시켰다. 1941년 테이텀은 미 공군에 징병되었다. 그곳에서 테이텀은 과거 디트로이트 이글스에서 뛰었던 프로농구선수 출신 제이크 에이헌을 만나 기본기와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제대 후 테이텀은 180도 다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특히 테이텀은 경기 전 하프라인에서 훅샷을 성공시키며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많은 전문가들은 테이텀이 훅샷을 창시했다고 주장(실제로는 1937년 유로바스켓에서 리투아니아 대표팀의 프라나스 탈주나스가 공식 경기에서 최초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하기도 한다. 또한 테이텀은 긴 팔과 큰 손을 이용한 패스 페이크로 상대방과 관중들을 속이며 팬들 사랑을 독차지 했다.

테이텀이 유머감각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면 화려한 드리블로 팬들을 매료시킨 선수도 있었다. 바로 마키스 헤인즈다. 헤인즈는 당시 중요한 기술이 아니던 드리블을 한 차원 높인 인물이다. 헤인즈는 오클라호마에 위치한 랭스턴 대학을 112승 3패로 이끈 스타였다. 그가 글로브트로터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3학년 때였다. 헤인즈는 랭스턴 대학 3학년 때 글로브트로터스와 경기에서 26득점을 올리며 74-70으로 승리를 견인하며 새퍼스틴을 놀라게 만들었다. 새퍼스틴은 즉시 글로브트로터스와 계약하자고 했지만 헤인즈는 졸업을 해야 한다며 1년 뒤인 1946년 글로브트로터스에 입단했다. 헤인즈의 드리블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경기 중 헤인즈가 드리블로 상대를 농락하는 동안 나머지 4명은 관중석에 가서 앉아 신문을 읽거나 관중들과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헤인즈는 슬라이딩을 하며 몸을 거의 누운 상태에서 드리블을 하거나 크로스오버 드리블, 비하인드 더 백 드리블, 렉스루 드리블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1964년 UCLA를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스타이자 NBA 올스타 가드였던 월드 해저드는 “헤인즈가 무릎을 꿇고 드리블하는데 아무도 공을 빼앗지 못했어요. 제가 7, 8살 때였는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라며 헤인즈를 회상했다. NBA의 전설적인 가드 매직 존슨도 “헤인즈는 드리블에서는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점점 자세를 낮춰 누워서도 드리블했죠. 공을 보지도 않았습니다”라며 헤인즈를 칭송했다. 월드챔피언 글로브트로터스, 거함 레이커스도 잡다! 

글로브트로터스가 전국적인 강호가 된 것은 1940년 제2회 월드 프로페셔널 바스켓볼 토너먼트(World Professional Basketball Tournament)에서 우승하면서였다. 1939년 시카고에서 시작된 이 대회는 오리지널 셀틱스, 뉴욕 렌스, 오시코시 올스타스, 포트웨인 졸너 피스톤스,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등 당대 최고의 팀들이 참가해 우승을 겨룬 대회로 1948년까지 이어졌다. 1939년 처음으로 이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새퍼스틴은 이 대회가 글로브트로터스를 알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1라운드에서 포트웨인 하베스트를 41-33으로 꺾은 글로브트로터스는 2라운드에서도 시카고 하먼스를 31-25로 물리치고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 상대는 당대 최고 팀이자 강력한 우승후보 뉴욕 렌스였다. 당시 뉴욕은 명예의 전당에 오를 두 명의 슈퍼스타 찰스 ‘타잔’ 쿠퍼(Charles 'Tarzan' Cooper)와 윌리엄 ‘팝’ 게이츠(William 'Pop' Gates) 그리고 위 윌리 스미스, 자니 아이작스 등이 버틴 강호였다. 글로브트로터스도 선전했지만 렌스는 너무 강했고 결국 렌스가 27-23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글로브트로터스도 충분히 강하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또한 전국적인 지명도도 얻을 수 있었다.

다음해인 1940년 글로브트로터스는 159승 8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다시 월드 프로페셔널 바스켓볼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라운드에서 케노샤 로열스를 50-26으로 가볍게 물리친 글로브트로터스는 2라운드에서 숙명의 라이벌이자 디펜딩 챔피언 렌스를 제압하고 기세를 올렸다. 준결승에서 시라큐스 레즈마저 제압한 글로브트로터스는 결승에서 당시 NBL 소속이던 시카고 브루인스를 31-29로 꺾고 대망의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이후 새퍼스틴은 유니폼 뒤에 월드 챔피언이라는 문구를 넣었고 유니폼도 성조기의 모양을 본따 다시 만들었다. 이후 글로브트로터스의 명성과 인기는 묘기까지 더해지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1948년 당대 최고의 팀은 조지 마이칸이 이끄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였다. NBL 챔피언이었던 레이커스는 1948년 월드 프로페셔널 바스켓볼 토너먼트에서 뉴욕 렌즈를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19일 시카고 스테디엄에서 레이커스와 글로브트로터스가 만났다. 새퍼스틴과 레이커스의 단장 맥스 윈터의 합의로 성사된 이 경기는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는 경기였다. 레이커스도 1947-1948시즌 대단한 기세를 보였으나, 글로브트로터스 역시 101승 무패를 기록 중이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208cm의 괴물 센터 마이칸 외에도 짐 폴라드, 험 셰퍼도 버티고 있었다. 물론 글로브트로터스도 테이텀, 헤인즈와 1950년 뉴욕 닉스와 계약하는 센터 냇 ‘스윗워터’ 클리프튼(Nat 'Sweetwater' Clifton)도 있어 만만치 않았다. 

전반까지는 레이커스가 분위기였다. 마이칸을 앞세운 레이커스는 전반을 32-23, 9점차로 앞서났다. 하지만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서 노장 인만 잭슨은 후배들을 독려했다. 후반 들어 글로브트로터스는 기동력을 앞세운 당시로는 생소했던 풀코트 프레스로 레이커스를 괴롭혔다. 점수차를 좁혀나간 글로브트로터스는 경기 종료 90초를 남기고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마이칸을 막던 테이텀이 5번째 파울을 범해 퇴장당했고 마이칸이 자유투를 성공하며 점수는 59-59 동점이 되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몇 초 없었다. 헤인즈는 재빨리 에머 로빈슨(Ermer Robinson)에게 패스했고, 로빈슨은 하프코트에서 원 핸드슛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공은 그물을 갈랐다. 결국 글로브트로터스가 레이커스를 61-59로 물리치고 최강자임을 증명했다.

글로브트로터스, 세계를 사로잡다

1950년 새퍼스틴은 마침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원정길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농구는 세계적인 스포츠가 아니었다. 영국의 웸블리 스테디엄에서 첫 경기를 치를 때만해도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TV로 중계된 첫 경기에 매료된 영국 관중들은 2차전을 보기 위해 무려 5만 명이나 웸블리를 찾았다. 영국 신문들은 글로브트로터스의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글로브트로터스의 첫 번째 월드 투어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새퍼스틴은 팀을 두 개로 나눠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1951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는 50,041명의 구름 관중이 글로브트로터스를 보기 위해 모였고 남미 투어 41경기 동안 총 50만 명 이상이 글로브트로터스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또한 구소련과 미국이 냉전 중이던 1952년 글로브트로터스는 동독의 베를린을 방문했다. 당초 우려와 달리 베를린 시민들은 글로브트로터스에 열광했고 무려 75,000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또한 이날 하프타임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 4관왕 제시 오웬스가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글로브트로터스는 초창기 농구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또한 인종의 벽을 허무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글로브트로터스는 여전히 전 세계를 누리며 경기 전 그들의 테마송인 ‘스윗 조지아 브라운(Sweet Georgia Brown)’을 틀고 소위 '매직 서클(Magic Circle: 하프 코트에 둥글게 서서 현란한 볼핸들링 묘기를 보이는 것)'이라 불리는 묘기를 보이고 있다.

FACT 정리
1.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가 처음 창단된 도시는? 
→ 1926년 일리노이州 시카고에서 창단 
2.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창단 당시 팀명은?
→ 사보이 빅 파이브(The Savoy Big Five)
3. 할렘 글로브트로터스라는 이름을 지었고, 글로브트로터스가 성장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구단주 겸 감독이었던 인물은?
→ 에이브 새퍼스틴(Abe Saperstein)
4.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가 일리노이 주(州) 힌클리에서 첫 경기를 승리하고 받은 수당은?
→ 75달러
5. 야구선수에서 뒤늦게 농구 선수로 변신해 글로버트로터스의 개그 농구에 영향을 미친 포워드는? 
→ 리스 ‘구스’ 테이텀(Reece 'Goose' Tatum)
6. 드리블의 귀재로 훗날 매직 존슨, 월트 해저드 등 NBA 스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가드는?
→ 마키스 헤인즈(Marques Haynes)
7.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매년 시카고에서 열렸고 1940년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가 우승했던 프로 농구 대회는? 
→ 월드 프로페셔널 바스켓볼 토너먼트(World Professional Basketball Tournament)
8. 글로브트로터스의 센터였다가 1950년 뉴욕 닉스와 흑인으로 가장 먼저 계약한 선수는?
→ 냇 ‘스윗워터’ 클리프튼(Nat 'Sweetwater' Clifton)
9. 1948년 글로브트로터스가 1948년 NBL 챔피언 레이커스를 꺾을 당시 결승골의 주인공은?
→ 에머 로빈슨(Ermer Robinson)
10.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테마송은?
→ 1925년 재즈 싱어 벤 버니가 부른 ‘스윗 조지아 브라운(Sweet Georgia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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