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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박재헌 신임코치“정말 우승 해보고 싶다!”
이재범()
기사작성일 : 2017-08-08 13:07
[점프볼=이재범 바스켓코리아 기자] 창원 LG는 현주엽 감독 선임에 이어 김영만, 박재헌, 강혁 코치 세 명으로 파격적인 코칭 스태프를 구성했다. 현주엽 감독과 김영만, 강혁 코치는 선수시절 프로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재헌 코치는 이들에 비해 덜 알려졌을 뿐 LG의 창단 멤버이자 첫 주장으로 LG가 창원에 인기 구단으로 안착하는데 한몫 했던 인물이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7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화려했던 학창시절 
박재헌 코치는 대방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SK 전희철 코치는 “(김)병철이가 4학년부터 먼저 하고 있었고, 석주일, 나, 재헌이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스카우트 되어서 5학년 때 같이 시작했다”며 “재헌이는 지금과 비슷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컸다”고 기억했다. 박 코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육성회비 내러 갔다가 키 크다고 잡혀서 핸드볼로 운동선수를 시작했다”며 “5학년 때 키가 크니까 농구 선수 제의가 와서 김병철, 전희철, 석주일과 함께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고 농구와의 첫 시작을 떠올렸다. 

박 코치는 용산중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도 농구와 인연은 계속 되었다. 에드, 찰스 오배넌 형제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알티샤(artesia) 고교를 전미 25위까지 이끌었다. 버클리와 UCLA 등 유명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은 박 코치는 한국 복귀를 염두에 두고 주전으로 활약 가능했던 UC 데이비스(Davis)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친 뒤 고려대로 옮겼다. 초등학교 때 동기였던 김병철, 전희철 코치보다 한 학번 아래였다. 



박 코치의 한국행은 여러 언론에서 다룰 정도로 주목 받았다. 고려대로 진학한 건 초등학교 동기들의 역할도 컸다. 당시 고려대 감독이었던 대한민국농구협회 박한 부회장은 “박 코치의 아버지와 먼저 만났다”며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을 두어 번 다녀갔다. 박 코치의 고교 코치까지 만나서 스카우트 의사까지 표시했다”고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박 코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1992년 11월 잠시 귀국했다. 전 코치는 그 때 박 코치를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기억했다. “고려대 영입을 추진할 때 한국에 들어왔었다. 그 때 병철이와 함께 박한 감독님의 특명을 받고 나갔다. 어릴 때보다 엄청 덩치도 커졌더라.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해보자고 했다. (박재헌 코치가) 우리 때문에 고려대를 선택한 거다.” 

박 코치는 서장훈의 대항마로 꼽혔다. 1993년 3월 한국으로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출전한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선 부진했다. 서장훈과의 첫 대결에서 완패였다. 서장훈은 20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한 반면 박 코치는 7점 2리바운드에 그쳤다. 고려대도 연세대에게 승리(69-87)를 내줬다. 박 코치는 당시 학교 등록 등으로 팀 훈련도 일주일 가량 밖에 소화하지 못한데다 귀국 직전 물집제거를 해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고려대는 박 코치가 미국과 다른 국내무대에 적응한 9월 대학농구연맹전에서 우승했다. 고려대가대학 무대 정상에 서는 건 5년 만이었다. 박 코치는 연세대와의 맞대결에서도 서장훈과 대등한 활약을 펼치는 등 골밑을 지키고 수비에서 높은 공헌도를 자랑했다. 전희철이 결장해 김병철에게 대회 MVP가 돌아갔으나 숨은 MVP로 꼽혔다. 박 코치는 “대학 센터 가운데 두뇌 플레이의 1인자”라는 평가도 들었다. 박한 부회장은 “박 코치를 데려와서 고려대가 승수를 많이 쌓았다”며 “95년에는 김병철, 전희철이 4학년이고, 양희승도 있고, 현주엽, 신기성이 가세해서 전관왕을 했다. 그 때 박 코치의 공헌도도 컸다”고 기억했다. 

Q. 김병철, 전희철 코치와 함께 했던 대방초 시절 성적이 좋았다고 하던데요. 
잘 했어요. 김병철 코치는 키가 작은 대신 굉장히 빨랐어요. 달리기를 잘 해서 농구를 시작한 걸로 아는데 (현역 시절처럼) 똑같이 잘 하는 재간둥이였어요. 그래서 키 큰 학생들을 많이 모았어요. 저와 전희철 코치, 석주일까지 가면서 신장이 좋았죠. 특히 주일이가 독보적으로 컸어요. 우리가 크다고 해서 170cm 중반이었는데, 주일이는 180cm대였으니까. 우리 말고 신장이 좋은 선수도, 힘 좋은 선수도 더 있었어요. 그래서 성적이 좋았던 거 같아요. 

Q. 중학교 때 억압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농구를 그만 두고 이민 간 건가요? 
그 당시에는 지금과 세대가 다르죠. 1학년 때 3학년이었던 선배들이 KGC 김승기 감독, 동부 이효상 코치, 모비스 김재훈 코치 등이었어요. 다 조금 강한 분들이시죠. 힘들긴 했지만, 부모님께서 공부하길 권유를 하셨어요. 이민을 가려는데 너무 운동에 치우친 생활을 해서 학업 준비가 안 되었어요. 미국에선 운동과 상관없이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이민 준비를 하며 공부를 했었죠. 11월 즈음 이민을 갔는데 여름 즈음 농구부를 그만 뒀을 거예요. 

Q. 알티샤(artesia) 고등학교 때 그렇게 잘 해서 무명의 학교를 랭킹에 오를 정도로 팀 전력을 끌어올렸습니다. 
고등학교 코치님과 아직도 상의 드릴 게 있으면 연락도 하는데 되게 지독하세요. 어릴 때 한국 친구를 사귀셨다고 해요. 덕분에 한국을 너무 잘 아셔서 저를 많이 키워주셨어요. 그 때 팀을 막 키우려고 하던 때라 성적이 나려고 했어요. 제 선배 중에 에드 오배넌이란 형이 있었고, 후배로 찰스 오배넌도 들어왔어요. 그 동기들 중에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학교 역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주 챔피언까지도 했어요. 제가 졸업할 때 팀이 전미 25위까지 올랐어요. 저도 후광과 혜택을 보고, NBA에 갈 실력의 선수들이 찾아와 함께 훈련해서 실력도 진짜 많이 늘었어요. 대학 코치들이 오배넌을 보러 왔다가 동양인에 키도 크니까 저도 눈에 띄었죠. 

Q. 버클리나 UCLA에서도 입학 제의를 받으셨죠?
제일 먼저 받은 곳이 버클리죠. 스카우트들이 기념일에 편지도 보내고, 캘린더도 보내주고, 크리스마스에는 엽서도 보내서 편지를 많이 받죠. 그리곤 성적이 안 되면 뛸 수 없으니까 성적을 제일 먼저 물어봐요. 한국처럼 코치와 어느 대학을 갈지 상의해요. 코치는 저보고 육사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곳을 어떻게 가요(웃음)? 최종적으론 하버드를 가라고 했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성적에 비례해서 좋은 학교를 갈 수 있거든요. 한국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사정을 아는 코치님께서 입학하자마자 뛸 수 있는 곳을 가라고, 디비전1의 잘 하는 곳에 가서 2~3년 벤치만 앉아있는 것보다 뛸 수 있는 낮은 곳을 가라고 하셔서 디비전1이었던 UC 데이비스에 진학했어요.

Q. 박한 부회장께서 고려대로 스카우트를 위해 미국까지 찾아오셨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한국 대학에서) 스카우트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버지께서 저에겐 고3 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대학 시절 감독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 뵌 적이 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잠깐 한국에 나왔을 때 연세대와 고려대를 방문한 적도 있고요. 저 말고도 몇몇 유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싶다며 한국 대학에서 트라이아웃처럼 테스트를 받았어요. 견디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나마 견딘 게 저였죠. 다른 대학보다 고려대에 아는 친구들이 더 많아서 끌렸어요.

Q. 한국에 들어온 게 학기 시작하기 직전인가요? 
미국에서 시즌을 마무리했어야 하고, 또 학교에다 솔직하게 상황이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UC 데이비스도 저를 스카우트 한 건데 죄송하죠.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프로 생활을 하는 게 가능하다. 미래를 볼 때 더 낫다”고 말씀 드렸어요. 또 고등학교 때 코치님께서 여러 가지 사정을 잘 설명해주셨어요. 그 덕분에 UC 데이비스와 잘 마무리하고, 3월 학기가 조금 시작한 뒤에 들어왔어요. 
 


Q. 서장훈 대항마로 데려왔다고 언론에 보도가 많이 되었는데요. MBC배에서 서장훈과의 첫 대결이 기억나시나요? 
연세대에게 졌죠. 저는 어떤 구도, 양상을 몰랐어요. 고려대에 가면 열심히 해야겠구나, 마음  먹었어요. 미국에서는 수업을 다 들어가고 할 거 다하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고 수업을 열심히 들어갔어요. 제가 전희철 코치와 같은 신문방송학과였어요. 아침에 “왜 수업 안 들어오냐”고 전화를 한 적도 있어요(웃음). 저는 어떤 정보도 없었어요. 서장훈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다른 건 전혀 몰랐어요. 와 보니까 서장훈과의 대결 구도라서 그럼 수비에 자신 있어서 열심히 해야겠구나 했었죠. 처음에 힘들었어요. 살도 엄청 빠져서 와이프도 대학 사진을 보면 몰라봐요. 


Q. 9월 대학농구연맹전에서 5년 만에 고려대를 정상으로 이끄는데 한몫 하셨어요.
MBC배에서 지고 나서 지옥훈련이 시작되었죠. 전 그런 게 뭔지 잘 몰랐어요. 하루 쉰 뒤 바로 머리 빡빡 밀고 트랙 달리며 그 대회 전까지 호주, 괌까지 전지훈련을 갔어요. 괌 전지훈련은 선배 때부터 힘들다고 유명했어요. 괌에서 바로 호주로 넘어가서 연습경기하고, 훈련한 뒤 돌아왔어요. 연세대에게 77-74(실제론 81-79)인가로 이긴 거 같은데 몇 년 만에 우승했던 걸로 기억해요. 

Q. 당시 전희철 코치도 부상으로 거의 뛰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대표팀에도 많이 나가는 시절이라서 그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그 대회에서 우승하며 이슈화가 되었는데 힘들었던 기억 밖에 없어요. 그 대회 지나고 정기전에서 졌어요. 또 악몽 같은 지옥훈련의 시작이었죠. 그 해 겨울 농구대잔치에서 조금 성적을 내고 그러면서 1학년이 훅 지나갔어요. 2학년이 제일 힘들었어요. 뭔가 조금 아는데 힘들었죠. 현주엽 감독님, 신기성 (신한은행) 감독이 새로 들어오시면서 성적이 나기 시작했죠. 그 때는 모두 다 힘들었을 거예요. 훈련도 많이 하고, 체육관 여건도 좋지 않았어요. 팬들께서 많이 좋아해주셨지만, 힘든 시절로 느껴요. 3학년 때부터 조금 정신 차렸어요. 2년 정도 한국에서 적응을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힘든 시기가 지나갔어요. 3학년이 된 3월부터 자리가 잡혔어요. 3학년 때 전관왕 했던 거 같아요. 

Q. 현재 현주엽 감독이 고려대에 입학한 뒤 고려대 성적이 좋아졌지만, 출전시간이 줄었어요.
그렇죠. 특화된 상황, 서장훈이 나올 때 많이 뛰었어요. 4학년이 되어서 많이 뛸 기회를 잡았어요. 중간에 슬럼프 아닌 슬럼프도 겪었고요. 아직 고려대로 옮긴 건 후회 안 해요. 여기(LG 코치)까지 올 수 있는 기회를 본 거고, 미국에서 올 때도 미래 보장은 아니더라도 (농구로서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운동이 힘들 때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래도 참고 이겨냈어요. 미국 LA에서 농구 좀 했던 저 같은 선수들이 연세대도 많이 가고, 고려대도 왔어요. 다 못 버티고 돌아갔어요. 생활, 훈련까지 이겨낸 건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힘들었던 건 다 추억이고요. 

13년 만의 친정 LG 복귀

LG는 97-98시즌 프로 무대부터 가세했다. 양희승, 박훈근, 박규현에 박재헌까지 버틴 고려대를 지명대학으로 선정해 이들을 주축 선수로 삼았다. 명지대 김태진, 한양대 이상영 등도 함께 했다. 오성식, 윤호영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노련미까지 더했다. LG의 첫 주장은 박 코치였다. 나이가 많은 오성식, 윤호영 등이 뒤늦게 합류한데다 나이가 한 살 많았던 것이 작용한 듯 하다. 전자랜드 김태진 코치는 “들어줄 거 들어주고, 못 들어주는 건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했다”며 박 코치가 무난하게 주장 역할을 소화했다고 전했다. 

박 코치는 코트 안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1997-1998시즌 정규리그 준우승에 단단히 한몫 했다. 평균 30분 9초 출전하며 13.9점 5.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LG는 당시 버나드 블런트를 중심으로 공격을 풀어나가는 수비 농구를 펼쳤다. 박 코치는 외국선수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국내선수로 각광받았다. 2년 연속 수비 5걸 센터 부문에 선정된 게 이를 증명한다. 부상 때문에 2000-2001시즌 정규리그에선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박 코치는 군 복무를 마친 뒤 2004년에 서울 SK로 팀을 옮겼다. 박 코치는 2005년 자유계약 선수로 3년 계약을 맺었음에도 2005-2006시즌이 끝난 뒤 계약 기간 2년을 남기고 미국 시민권 때문에 은퇴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약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박 코치의 복귀 무대는 남자농구가 아닌 여자농구단 KB스타즈 코치였다. 당시 KB스타즈를 이끈 여자농구 국가대표 서동철 감독은 “외국선수를 관리해줄 코치를 찾았는데 영어를 잘 하는 장점이 있는데다 인간적인 평이 좋았다”며 박 코치를 선임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성실하고, 성품이 착하다”며 “여자 팀에 어울리게 세세하고 꼼꼼해서 점수를 많이 주고 싶다. 모나지 않게 코치 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박 코치의 역량을 치켜세웠다. 

박 코치는 현주엽 감독, 김영만 코치와 마찬가지로 한 때 몸담았던 친정 LG로 복귀했다. 현 감독은 8년, 김 코치는 11년 만이라면 박 코치는 2004년 이후 13년 만이다. 박 코치는 “다시 왔다는 게 남다르다. 남자농구로 간다면 LG를 생각하고 있었고, 애정이 많이 가는 팀”이라며 “어릴 때도, 미국에서도 선수 생활을 하며 우승을 못 해본 적이 없는데 프로에서만 못 했다. 이제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코치로서)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LG 창단 멤버였던 김태진 코치는 “현주엽 감독이 (박)재헌이와 (강)혁이를 코치로 부를 건 두 선수와 같이 생활해봐서 아는데 100% 정말 잘한 거다”며 “재헌이는 사람이 납득하도록 설명을 해준다. 또 통역이 말하는 것과 재헌이가 코치로서 외국선수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다를 거다”고 기대했다. 

Q. LG에 입단해서 외국선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국내 장신 선수로 주목 받았어요. 
대학 때 몸이 많이 축 났나 봐요.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 강팀이라서 여러 후원을 많이 받아 주전 5명은 호텔 같은 곳에서 따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어요. 우리나라가 아직 테이핑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모를 때 차트에 적어가면서 전문 트레이너에게 배웠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나름 몸이 좋아서 밀리지 않았고, 또 매일 흑인 선수들하고 부딪히는 파워포워드나 센터 수비를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 시기를 보내며 몸무게가 95kg 이상 올라가지 않았어요. 가장 많이 빠졌을 때 86~87kg까지 나갔어요. 그만큼 몸이 축 난 거죠. 
LG가 신생팀이지만 프로이기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식단도 더 좋아지고, 합숙 생활로 규칙생활을 하니까 원래 몸무게인 100kg을 넘어가더라고요. 몸이 좋아지면서 재미가 있었어요. 미국에서 운동하던 느낌도 들면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외국선수 제도가 생겼는데 저는 거부감이 없었거든요. 미국에서 생활한 그게 큰 장점이 되었죠. 외국선수 중에도 부딪혀보면 별거 아닌 선수가 있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소위 지레 겁먹은 부분도 있었거든요. 전 그걸 미리 알아서 제가 코트에 나가면 외국선수를 막아서 훨씬 유리했죠.

Q. 당시 고려대 동기였던 박규현, 박훈근과 함께 '쓰리 박'으로 활약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좋았던 게 단단하게 잘 뭉쳤어요. 주말에 운동 끝나고 헤어져도 이상하게 저녁에 다 모여요. 그게 다 힘이 되었어요. 잘 뭉치고 젊고 싱싱해서 분위기를 타니까 확 치고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성적을 낸 거 같아요. 

Q. 박재헌 코치에게 버나드 블런트란? 
블런트요? BB. 아~(웃음). BB가 저에게 처음 물어본 게 “여기 나이트클럽이 어디냐?”는 거였어요. 재미있는 친구예요. 블런트, 도망도 갔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애증이에요. 그 친구 덕분에 좋은 시절 보냈는데요. 블런트는 자기 색깔이 확실해요. 훈련하면서 여길(팔뚝 안쪽 살) 엄청 꼬집어요. (팔을) 끼고, 꼬집고 이런 반칙을 되게 잘 해요. 또 가르쳐줘요. 여기 이렇게 넣고 꼬집으면 (심판들이) 모른다고, 여기 꼬집히면 엄청 아파요. 운동하다가 블런트에게 꼬집혀서 싸울 뻔 했어요. 블런트는 대학 때 무릎이 반으로 쪼개지는 큰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NBA 진출을 바라봤던 굉장히 잘하던 선수였어요. 

Q. 이충희 감독에서 김태환 감독으로 바뀐 2000-2001시즌부터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태환 감독께서 오셨을 때 무릎 수술을 했어요. 2000-2001시즌 중반 이후에 복귀해서 챔피언결정전만 뛰고 군대 갔었죠! (Q. 군대 갔어요?) 전 병필이에요. 영주권자인데도 자진신고를 해서 공익근무이지만 국방의 의무도 마쳤어요. 군대 안 가도 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회창 대통령 후보 아들 문제 이후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갔어요. 프로 생활을 계속 하면 걸림돌이 될 수 있어서 자진신고 했어요. 수술도 받고, 키도 커서 4급이 나왔어요. 결혼을 일찍 해서 와이프가 임신 상태였어요. 또 나름 몸 관리를 하는 선수 중 한 명이어서 상무보다 공익근무를 갔죠. 26개월 힘겹게 구청 세무과에서 근무했습니다. 

Q. 2004년에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트레이드 소식을 휴가 때 트레이너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어요. 약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아쉽긴 했어요. LG에서 첫 4시즌간 열심히 했고, 인지도를 창원에서 굳혔는데, 그 당시 김태환 감독님과 안 맞는 부분이 있거나, 제가 부족했겠죠. 반은 아쉽고 반은 ‘(SK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Q. SK에서 2시즌을 보낸 뒤 은퇴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 마무리를 잘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6년 반 정도 떠나 있었죠. SK가 플레이오프에 떨어진 뒤 미국으로 입국할 때 “영주권자인데 왜 오래 나가있냐? 작년에 얼마나 있었냐?”라며 붙잡혀서 여권을 뺏길 뻔 했어요. “한 번만 더 그렇게 하면 뺏겠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이 계시는) 미국에 쉬러 들어갔는데 한국나이 34살인데다 무릎과 아킬레스건이 안 좋아서 힘이 조금 빠져 회의를 느낄 때였어요. (선수생활을) 그만 하라는 의미인가보다 생각해서 (SK에) 통보만 하게 되었어요. 그건 후회했어요. 돌아와서 선수생활을 마치는 게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더 좋았고, 맞았구나라고 생각해요.  

Q. 2013-2014시즌에 KB스타즈 코치로 복귀하셨어요. 
미국에서 생활을 이야기하면 길어요. 6년 반 동안 여러 일을 했어요. 회사생활부터 고철사업을 한다고 하와이에서 살기도 했죠. 그때가 터닝포인트인데 농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년, 2011년 즈음이에요. 하와이에서 1년 반 가량 살면서 험한 사람들과 일도 하고, 물류에서 수출까지 다 맡아서 진행해 재미있었지만, 농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침 집에서 쉬고 있는데 미국으로 박한 선생님께서 팀과 함께 오셨다는 거예요. 설거지 하다가 나가서 만났죠. 그 때부터 연관이 되어서 기쁘게 고려대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고려대가 매년 미국으로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일정을 관리했던 분에게 제가 해도 되겠냐고 해서 온전하게 처음부터 고려대의 연습경기와 훈련 일정을 모두 잡았죠. 그걸 계기로 여러 추천을 해주셨는데, 서동철 감독님께 코치 제의를 받았어요. 아마 제가 여자농구도 괜찮다고 누군가에게 말씀 드렸던 거 같아요.

Q. LG 코치 선임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감독님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외국선수 드래프트 때 가끔 갔는데 그 때 현주엽 감독님도 오시면 만났어요. 그 전에도 미국에 친한 (현주엽 감독의) 동기가 한 명 있어서 종종 오셨는데 그 친구가 저와 사촌처럼 지내는 사이라서 같이 만났었거든요. 그게 인연이 아니었을까? (코치 제의) 연락이 왔을 때 되게 고마웠어요. 

Q. 현주엽 감독 선임 소식을 듣고 혹시 코치로 부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시지 않았나요?
(뜸을 들인 뒤) 했어요(웃음). 살짝. 이런(코치가 감독보다 나이가 많은) 구도로 가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김영만 코치님 선임은 정말 놀랐어요.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누군지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한 명은 위, 한 명은 아래라고. “나보다 나이가 많다 말이야” 그랬거든요. 현주엽 감독님께서 선임되시지 않았다면 전 LG로 복귀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살이 더 쪘을 거예요. 

Q. 우승이 목표인 LG에서 어떻게 코치 역할을 하실 건가요? 
코치 역할이 1~2가지가 아니에요. 코치 생활을 오래 한 건 아니지만, 감독님께서 안 보시는 시각으로 경기나 훈련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같은 시작으로 보면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서동철 감독님께서 주입을 시켜주셨어요. 감독님께서 못 보시는 부분이 있기에 그런 부분을 메우니까 팀이 탄탄해지더라고요. 빈틈이 없어지는 팀으로 느껴지고, 단합이 되었어요. 제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싶고요. 우승이 목표인 건 당연한데, 우승을 하려면 현실적으로 외국선수의 역할이 클 거예요.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 친구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대화와 부상 관리도 하며 이야기도 많이 들어주려고요. 이런 두 가지 역할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BONUS ONE SHOT 
박재헌 코치의 센터 포지션 훈련은? 

LG는 가드(강혁), 포워드(김영만), 센터(박재헌) 출신 코치로 구성되어 포지션별 훈련이 가능하다. LG는 실제로 야간 훈련을 그렇게 진행 중이다. 박재헌 코치는 어떤 부분을 가르칠까? 박 코치는 “분업화해서 하는 건 여자팀에 있을 때 많이 했다. 그래서 많이 찾아보는 공부와 함께 정리해서 훈련을 했었다. 다른 팀도 안 하는 건 아니다”라며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박 코치에게 센터 훈련을 받은 류종현은 “센터 출신이셔서 우리에게 잘 맞는 포스트 스킬을 알려주신다”며 “드리블도 가드들처럼 리듬있게 치는 게 아니라 포스트업에 유용하게 파워있게 친다. 외곽으로 내주는 패스도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바로 빼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기본이지만, 스킬 부분이 가미된 것들”이라고 전했다.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쏠리는 선수는 김종규다. 박 코치는 “국내선수에서 저 정도 점프해서 저런 덩크슛을 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실제 보니까 가진 게 많은 선수”라며 “그런데 일깨워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봐서 못 하는 거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힘에서 밀리는 게 아니라 자세나 밸런스, 힘을 쓰는 요령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니까 (자질이) 더 좋다”고 김종규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 

#사진=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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