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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센터’ 표필상 “사라지는 정통센터, 한국농구 걱정돼…”
곽현(rocker@jumpball.co.kr)
기사작성일 : 2017-03-03 08:26

[점프볼=곽현 기자]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농구 팬들이라면 ‘표필상’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기억할 것이다. 2m가 넘는 우람한 체구에 푸근한 인상으로 SBS 스타즈의 골밑을 지켰던 그를 말이다. 은퇴 후 자신의 이름을 건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동호회농구에서 선수로도 활동 중인 표필상(49) 씨를 만났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마흔까지 코트 누빈 성실맨
SBS 스타즈(현 KGC인삼공사)에서 성인무대에 데뷔했던 그는 당시 정재근, 오성식, 이상범 등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2m 장신이 드물었던 90년대 초반만 해도 그는 듬직한 정통센터였다. 덩치가 좋았고, 손발도 컸다. 하지만 프로농구 출범 후에는 외국선수들에 가려 많은 빛을 보지는 못 했다. 프로 통산 평균 1.8점 1.8리바운드로 기록은 초라했다. 하지만 그는 마흔 살까지 뛰며 오랫동안 선수로서 코트를 누볐다. 그만큼 꾸준히 몸 관리를 했고, 성실히 선수 생활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래 하고 싶어서 했던 건 아니에요. 전자랜드에 갔을 때 최희암 감독님께서 제가 좀 더 뛸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분이 컸어요. 제가 잘 했다기보다는 팀에 필요한 역할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그는 서울 불광동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표필상 농구교실’을 운영 중이다. 또 학교스포츠강사로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주며 농구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농구교실은 8년째 하고 있어요. 아이들 가르치는 거요? 재밌죠. 아이들이 말도 잘 듣고요. 앞으로 계속해서 유소년농구를 발전시켰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그의 현역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표필상이 뛰던 시절만 해도 외국선수들이 2명씩 40분 내내 뛰었고, 대부분이 빅맨형 선수들이었다. 그와 같은 국내센터들이 자리를 잡기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뛰기 힘들었던 것보다 심판들의 편파 판정 때문에 불만이 많았어요. 외국선수들이 미는 건 안 불고, 국내선수들한테 파울을 많이 줬어요. 외국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기 위해 국내선수들이 피해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항의요? 잘 안 했어요. 항의해봤자 나에게 득 될게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냥 웃고 넘기는 게 속 편했죠.”  

그는 SBS, LG, 삼성, 전자랜드 등 4팀에서 뛰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뛰고 전성기를 누렸던 팀은 SBS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은 2000-2001시즌이었어요. 김인건 감독님, 김동광 코치님 계실 때인데, 우리가 4강에 올랐죠. 데니스 에드워즈, 리온 데릭스와 같이 뛸 때라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전까지는 거의 교체멤버였는데, 그 때는 베스트5로도 많이 뛰었어요. 에드워즈가 몸싸움을 잘 못 해서 저를 많이 기용하신 것 같아요.” 당시 데니스 에드워즈는 일명 ‘막슛’이라 불리는 독특한 슛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경기당 33.42점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으로 득점왕에 올랐다. 에드워즈는 플로터를 즐겨 썼는데, 당시 국내엔 보편화되지 않은 기술이라 ‘막슛’으로 불렸던 것. SBS는 프로 원년 제럴드 워커라는 테크니션을 앞세워 팬들의 눈을 사로잡기도 했다. 표필상은 워커에 대해 “워커의 패스를 국내선수들이 잘 못 받았어요.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선수가 있었으면 더 오래 뛰었을 겁니다. 김승현은 (마르커스)힉스가 패스를 받을 줄 알았으니까 더 빛났다고 봐요.”  

 

마흔 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는 좀 더 철저한 몸 관리가 있었다면 더 나은 선수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몸 관리를 더 잘 했다면 외국선수들한테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SBS 처음 갔을 때 체육관, 숙소가 없어서 6개월 동안 고생을 했어요. 그 때 몸 밸런스가 많이 깨졌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좀 게을렀던 부분이 있어 아쉬움이 남죠.”

 

뒤늦게 들어선 농구의 길
표 씨는 집안 대대로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 집안이다. 부친 표복수 씨도 195cm나 되는 장신이다. 어릴 적엔 부친이 씨름을 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 키가 190cm였는데, 체중은 70kg밖에 안 됐어요. 저는 키가 다 큰 후에 살이 찐 케이스에요. 씨름하기 싫어서 도망 다니고 그랬죠. 운동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냥 부산대에 진학해서 교사 자격증이나 딸까 했는데, 키가 2m까지 크면서 중앙대에 스카우트 되고, 많이 배우게 됐죠.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유전자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의 아들 표경도 군도 현재 명지대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올 해 3학년이 되고 키도 195cm나 된다.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시켰죠. 농구가 워낙 힘든 운동이다 보니 시킨 게 후회도 되는데,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잘 할 때도 있고, 안타까울 때도 있는데,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물어보면 슛폼 잡는 것 정도는 가르쳐줘요. 우리 집은 키가 다 커야 살이 붙어요. 아직 살이 안 찌는 걸 봐서 키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먹는 건 엄청나게 먹는데 안 찌더라고요. 전 센터였지만, 아들은 4, 5번을 다 했으면 좋겠어요. (김)주성이처럼 리바운드도 하고 득점도 해줄 수 있는 선수로 컸으면 좋겠어요.”

정통센터 줄어 아쉬워
동료인 정재근, 오성식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을 때 그는 궂은일을 도맡으며 팀의 안살림을 책임졌다. 궂은일에 국한된 역할에 불만은 없었을까? “궂은일을 하는 선수가 있어야 화려한 선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축구도 골키퍼가 잘 해야 팀이 안정감이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었어요. 다만 그런 궂은일을 하는 선수에게 팀에서 더 대우를 해주고,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는 생각은 있어요. 지금도 센터들 연봉은 적은 편이죠.”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통센터라고 할 만한 선수들이 사라지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정통센터가 없어요. (김)주성이가 예전에 센터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밖에서 슛을 많이 쏴요. (서)장훈이도 점점 외곽플레이를 많이 했죠. 정통센터가 점점 없어지는 부분이 아쉬워요.” 이러한 추세에는 역시 외국선수들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아마추어 무대에서도 포워드로 전향하는 장신선수들이 늘고 있다. 외곽슛 던지는 센터가 세계적 추세라고는 하지만, 많은 빅맨 출신 농구인들은 “외곽슛을 던지더라도 먼저 기본적인 플레이는 익히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그런 측면에서 기본이 잘 갖춰진 장신선수들이 줄고 있다. 표필상이 아쉬워 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선수들이 손해를 보는 부분이 있어요. 계약금도 없고 외국선수가 2명씩 뛰고 있으니까요. 어린 선수들도 전부 센터를 안 하려고 해요. 안타까운 부분이죠. 이렇게 되면 국제경쟁력이 점차 줄어들 것 같아 우려됩니다.”

 

지기 싫었던 선수 이창수
현역 시절, 리그에는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선수들이 많았다. 정경호(전 TG삼보), 이창수(전 LG), 박상관(전 오리온) 등이 대표적이다. 경기 때면 늘 몸을 부대끼며 몸싸움을 벌였던 상대들이기도 하다. “대학 때는 서로 욕도 하고 싸우기도 했죠. 하지만 실업팀에 와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그 중 가장 지기 싫었던 상대는 창수였어요. 창수가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힘이 좋았어요. 그래서 라이벌 의식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두 선수는 KBL 최고령 선수 타이틀을 바통터치 하기도 했다. 표필상이 은퇴한 이후에는 이창수가 바통을 이어받아 KBL 역대 최고령 선수로 남은 것이다.  

 

한편 표필상은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990년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북경아시안게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에 출전한바 있다. “그 때는 대학생이라 형들 보조하는 역할이었어요. 이충희, 이원우(전 현대), 김현준(전 삼성) 같은 형들이 최고참이었죠. 충희 형하고 같이 연습을 해보니 왜 최고의 슈터인지를 알겠더라고요. 어떻게든 패스를 받으면 슛이 들어갔어요. 100개 던지면 96개가 들어갔다니까요. 같이 하면 연습이 안 될 정도로 우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죠.”

미래 위해 유소년농구 키워야
올 해 나이 쉰이 됐지만, 그는 동호회농구에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해원’이란 팀에서 농구를 하고 있어요. 40대 이상만 속해 있는데, 요즘 저 말고도 선수 출신들이 많아요. (김)유택이 형도 뛰시고, (신)동찬이 형도 아직 잘 뛰시죠. 선수 때 많이 안 다쳐서 그런지 아직도 무릎이 괜찮아요. 농구하고 술을 많이 먹다 보니 체력이 좀 떨어지는 건 있어요(웃음).” 201cm인 그가 골밑에 버티고 있다면 다른 팀으로선 골밑을 공략하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울 것 같다. 일선에서 유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는 유소년농구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바로 한국농구 미래를 위한 길이라며 말이다. “초등학교 농구가 많이 죽었어요. 은평구에 선일초등학교가 없어지면서 서울에 초등학교 팀이 4팀밖에 안 남았어요. 더 활성화 시켜야 돼요. 결국 프로에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엘리트 시스템이 어렵다면 생활체육으로라도 갈 수 있도록 변화를 줘야 해요. 축구를 예로 들면 동네에 축구장, 풋살장은 굉장히 많아요. 반면 농구장은 학교 체육관밖에 없죠. 농구는 위에서 끌어줘야 한다고 봐요. KBL이 나서서 유소년들을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농구인 표필상은…
1968년 2월 17일생인 그는 부산동아고, 중앙대에서 농구를 했다. 현역 시절 201cm, 107kg의 좋은 체격조건을 바탕으로 프로농구 SBS, LG, 삼성, 전자랜드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총 11시즌을 뛰었고, 마흔 살까지 선수생활을 할 만큼 오랫동안 코트를 누볐다. 국가대표로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경력도 있다. 현재 자신의 이름을 건 ‘표필상 농구교실’을 운영 중이며 학교스포츠강사로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문복주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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